글. 양태룡(인문고전연구소 경인학당 대표)
하와이 호놀룰루, 와이키키 해변에서 만난 반얀트리(Banyan Tree)는 내가 오랫동안 굳게 신봉해 온 ‘근본’에 대한 상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자연의 순리란 땅 깊숙이 내린 뿌리에서 줄기가 솟아오르고, 그 줄기에서 다시 가지가 뻗어 신록을 이룬다. 그것이 식물의 이치이자 삶의 질서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나무는 그런 인간적 상식을 유유히 비웃듯 살아가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뻗어가던 가지에서 어느 날 문득 줄기가 아닌 ‘뿌리’가 아래로 내려온다. 공중에 매달린 채 바람 속에서 흔들리던 기근(氣根)은 마침내 땅에 닿는 순간, 다시 단단한 기둥이 되어 제 몸을 떠받친다.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생명이 스스로 새로운 뿌리를 만들고, 그 뿌리가 다시 줄기가 되어 끝내 하나의 숲을 이루는 것이다.
그 장엄한 생명력 앞에 서 있으니 혼란스럽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무엇이 본질이며 무엇이 현상인가. 줄기가 뿌리가 되고, 뿌리가 다시 줄기가 되는 풍경 속에서는 우리가 굳게 믿어온 경계와 정의들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흔히 ‘근본(根本)’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뿌리(根)와 줄기(本)를 거슬러 올라가 사물의 본원과 정통성을 탐색하는 일이다.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단단한 중심, 기본 원칙을 묵묵히 지켜내는 태도, 그리고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끝내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 힘. 우리는 그러한 깊이와 중심성을 일컬어 ‘근본’이라 부른다.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라는 오래된 가르침처럼, 근본이 바로 서야 비로소 나아갈 길이 열린다고 믿어왔다. 기초가 부실한 성은 쉽게 무너지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단단히 다지는 것만이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와이키키의 반얀나무는, 근본이란 반드시 고정된 자리에서 꼼짝없이 버티고 있어야 한다는 나의 통속적인 도그마를 유쾌하게 허물어뜨렸다.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가지에서 뿌리가 내려오는 모습은 질서를 거스르는 ‘불통’이며 규칙의 파괴다. 그러나 나무는 인간이 만든 기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본성에 충실했을 뿐이다. 태평양의 바람과 습기, 햇빛과 토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새로운 기둥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자신의 영토를 넓혀갔다. 만약 인간의 잣대로 “너는 가지인데 왜 뿌리를 내리느냐”고 꾸짖으며 그 기근들을 잘라냈다면, 반얀나무는 오래전에 거센 바람 속에서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문득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상기(象記)」가 떠올랐다. 연암은 ‘뿔이 있는 짐승은 날카로운 이빨이 없다’는 세상의 상식, 곧 ‘각자무치(角者無齒)’라는 통념을 코끼리라는 존재 하나로 단숨에 무너뜨렸다. 코이면서도 손이 되고, 이빨이면서도 뿔이 되는 상아를 지닌 코끼리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분류와 규격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자연의 신비였다. 어디 그뿐인가. 연암은 천하의 장관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화려한 궁궐이나 찬란한 보석이 아니라, 길가에 뒹구는 ‘말똥’과 ‘깨진 기왓장’을 들었다. 버려진 기왓장도 조화롭게 쌓이면 훌륭한 담장이 되고, 말똥조차 거름이 되어 다시 생명을 키워낸다. 세상에는 본래부터 천하거나 귀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쓰임과 자리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완성해갈 뿐이라는 통찰이었다. 연암의 시선과 반얀나무의 생태는 어느새 하나의 진실 속에서 맞닿아 있었다.
이러한 깨달음 앞에서 보면, 우리는 흔히 근본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이해해 왔는지도 모른다. 마치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와 잎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고정된 질서만이 정통의 길인 것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반얀나무는 그 통념을 조용히 뒤집는다. 가지가 다시 땅으로 내려와 뿌리가 되고, 새로운 줄기를 이루며 또 다른 생명의 중심으로 자라난다. 시작과 결과,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끊임없이 뒤섞이며 하나의 거대한 숲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 역시 반드시 경직된 질서의 논리로만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공자가 말한 ‘본(本)’은 삶과 인간다움의 근간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본은 결코 죽은 형식이나 박제된 절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근본이라면 시대와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때로는 기존의 절차적 타당성이나 통속적인 성공의 공식을 거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이 자기만의 세계와 하나의 일가(一家)를 이루는 일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형식의 순서를 얼마나 충실히 밟았느냐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지탱할 내면의 뿌리를 얼마나 살아 있게 간직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결국 근본이란 태초부터 굳어 있는 화석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모시키고 확장해가는 살아 있는 생명력인지도 모른다. 정통이라는 이름의 권위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때로는 가지가 뿌리가 되고 뿌리가 다시 줄기가 되는 유연함을 품을 때, 삶은 비로소 쉽게 쓰러지지 않는 거대한 숲이 된다.
와이키키의 푸른 파도와 반얀나무의 숲 아래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근본이란 한 자리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하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이제 ‘근본이 바로 서야 한다’는 말도 더 이상 단단한 형식과 불변의 질서를 지키라는 의미로만 들리지 않는다. 참된 근본은 오히려 바람 속에서도 스스로 새로운 뿌리를 내려 삶을 지탱해가는 반얀나무처럼,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끝내 생명을 이어가는 유연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힘에 가까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