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가이 블랙(Guy Black‧캐나다) / 대한민국 국민훈장 수훈자·가평군 명예군민
2026년 4월 26일, 나는 가평군 북면 캐나다전투기념비 앞에 섰다.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쉽게 첫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오늘은 과연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까.’ 출발을 앞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반드시 이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75년 전 가평전투에서 자유를 위해 싸운 유엔군 장병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걸은 길은 가평에서 부산 유엔기념공원까지 625km였다. 이 거리는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숫자인 동시에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길이었다. 약 한 달 동안 하루 25~30km씩 걸으며 서울을 지나 남쪽으로 향했다. 이번 여정은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2021년 캐나다 토피노에서 랭리까지, 2023년 랭리에서 가평까지 걸었고, 올해 마지막 여정을 완성하며 오랫동안 이어온 ‘가평 퍼즐’을 비로소 마무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길을 걷느냐고 묻는다. 나는 군사역사학자로 한국전쟁을 연구하면서 가평전투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됐다. 1951년 4월, 영연방군은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진지를 지켜 서울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많은 젊은 장병들이 목숨을 바쳤고, 그들의 희생이 오늘의 자유를 가능하게 했다. 나는 그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출발 당시 내 몸 상태는 완전하지 않았다. 무릎과 발의 부상이 남아 있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뜨거운 햇볕과 높은 습도, 끝없이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은 예상보다 훨씬 힘겨웠다. 몸은 점점 지쳐 갔지만 참전용사들이 겪었을 고통에 비하면 내가 감당한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한국 국민들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길을 알려주고, 물을 건네고, 응원의 말을 전해 준 수많은 사람들의 친절은 지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따뜻한 마음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곳에는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젊은 장병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자유와 평화는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겼다.
나는 캐나다 사람이지만 이제 한국은 내게 특별한 나라가 됐다. 특히 가평은 자유를 위해 희생한 젊은이들의 정신이 살아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앞으로도 가평전투의 의미를 세계에 알리는 일을 계속해 나가고자 한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기억마저 사라져서는 안 된다. 이번 625km의 여정이 단순한 도보 종단이 아니라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계속 걸으며 가평전투의 의미를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의 오늘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 가평전투의 정신은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