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서 배우는 격물치지의 공부-
글. 양태룡(중랑구청 평생학습관 인문학 강사)
퇴직하고 백수 6년차. 물론 완전한 백수는 아니다. 가끔 강의를 하고 몇 개의 회장 직함도 맡고 있다. 경제적 활동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벌이는 거의 없는데 씀씀이는 오히려 늘어나는, 조금은 역설적인 삶이다. 그래서 도회지와 농촌을 번갈아 오가며 살아간다.
도회지에서는 사람을 만나 회의도 하고 강의도 하며 관계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농촌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호젓하게 지낸다. 사람 속에 있다가 자연으로 돌아오고, 다시 사람 속으로 들어간다. 사람과 시간을 나누고 자연과 공간을 함께하는 셈이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삶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길과 온전히 맞닿아 있다.
『대학』은 “치지는 격물에 달려 있다(致知在格物)”고 했다. 주희는 격물을 “즉물궁리(即物窮理)”, 곧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여기서 물(物)은 단순한 물건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과 일, 관계와 현실도 모두 내가 궁구해야 할 구체적인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많은 것을 경험하는 데 있지 않다. 눈앞의 사물과 일에 나아가 그 속에 담긴 이치를 깊이 묻고 궁구하는 데 있다.
사물에 나아가 하나의 이치를 알고, 또 하나의 이치를 알아가다 보면 처음에는 서로 흩어져 있던 개별적인 앎들이 어느 순간 하나로 밝게 통하게 된다. 이것이 활연관통(豁然貫通)이다. 개별적인 이치를 하나씩 궁구하여 그 앎이 쌓이고 서로 연결되면, 마침내 여러 사물과 일에 깃든 이치, 곧 중리(衆理)를 두루 궁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앎이 지극해지면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일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일에 두루 응할 수 있는 지혜로 나아간다.
결국 격물치지는 세상을 많이 알기 위한 지식 자랑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극진하게 하고 마침내 만사에 제대로 응하기 위한 공부다.
그러나 앎이 깊어졌다고 해서 그 앎으로 세상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앎이 깊어질수록 만물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겸손하고 담담해져야 한다. 이 지점에서 장자가 말한 ‘거울의 마음’을 떠올릴 수 있다.
지인지용심약경 불장불영 응이불장 고능승물이불상
至人之用心若鏡 不將不迎 應而不藏 故能勝物而不傷
지인의 마음 쓰는 것은 거울과 같아서, 보내지도 않고 맞이하지도 않으며, 응하되 간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물에 응하면서도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거울은 다가오는 것을 미리 맞으러 나가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붙잡지도 않는다. 다만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비추고 사라지면 놓아준다. 不將不迎, 應而不藏은 무관심하라는 뜻이 아니라, 눈앞의 일에는 온전히 응하되 지나간 일과 감정에 붙잡히지 않는 태도다.
격물치지를 통해 얻은 앎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다. 깊이 알고 제대로 응하되, 그 앎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도회지에서는 사람과 시간을 나누며 사람과 일의 이치를 배우고, 농촌에서는 자연과 공간을 함께하며 자연의 질서를 배운다. 그렇게 하나를 알고 또 하나를 알아가며 앎을 연결하다 보면 활연관통에 이르고, 그 앎은 삶 속에서 만사에 응하는 지혜가 된다.
도회지와 농촌을 오가는 삶은 단순히 공간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사람과 시간을 나누고, 자연과 공간을 함께하며 삶 속에서 이치를 궁구하는 것, 이것이 내가 걸어가는 격물치지의 공부다. 어쩌면 퇴직 후의 삶은 공부의 끝이 아니라 삶 자체가 공부가 되는 새로운 시작인지 모른다.
사람과 시간을 나누고, 자연과 공간을 함께하는 것. 이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내가 계속해 가고 싶은 격물치지의 공부다. 그리고 이 공부는 사물의 이치를 아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밖의 이치를 궁구하여 얻은 앎을 다시 내 마음으로 돌려, 자신을 속이지 않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正心)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