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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칼럼] 지도자의 사적 감정이 부른 몰락의 길

기사입력 2026-09-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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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용(호국문예작가. 경영학박사)

젊어서는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과 교류하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을 상대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삼국시대 천하 영웅호걸들의 패기와 모험심을 순수하게 배울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책사들의 음모와 잔꾀만 잔뜩 흉내 내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젊은 시절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감동 속에 삼국지를 세 번 독파했다. 이제 나이 들어 다시 책을 열었지만, 촉한의 황제 유비가 독선과 오만에 사로잡혀 이릉대전을 일으켰다가 참패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그만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유비는 일찍이 고향 탁군 탁현에서 짚신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관우, 장비와 만나 도원결의를 맺고 난세에 뛰어들었다. 떠돌이 군주에 가까웠던 유비는 적벽대전을 계기로 재기의 발판을 만들었고 이후 형주 일부를 기반으로 익주와 한중을 차지하며 제갈공명이 제시한 '천하삼분지계'를 현실로 만들어 갔다. 마침내 촉한의 황제 자리에 오르며 인생 최정점에 서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영웅의 마지막은 빛나지 않았다. 생애 마지막에 모든 국력을 쏟아붓고도 동오에게 참패한 이릉대전은, 평생 의리와 덕을 앞세웠던 지도자가 한순간의 사사로운 감정과 독선에 사로잡혔을 때 어떤 낭패가 찾아오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지도자의 오만은 결국 국가를 위기로, 백성을 도탄으로 몰아넣는다는 비극적 교훈을 후세에 남긴 것이다.

대륙의 삼국시대 3대 전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릉대전은 겉으로는 동오에게 빼앗긴 형주 지역을 되찾고, 촉한의 정통성과 위신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도원결의로 맺어진 형제에 대한 사사로운 복수심, 참모들의 충언을 외면한 지도자의 독선, 그리고 신생 국가 촉한이 처한 생존의 절박함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형주는 단순한 영토가 아니었다. 촉한이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이자, 관우가 지키던 상징적 거점이었다. 그러나 동오의 기습으로 형주가 함락되고, 관우가 끝내 참수당하면서 유비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관우는 단순한 장수가 아니었다.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형제였으며, 촉한이라는 나라의 의리와 명분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장비마저 부하의 손에 목숨을 잃자, 유비의 분노는 더 이상 이성의 통제를 받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제갈량과 조운을 비롯한 핵심 인물들은 진정으로 맞서야 할 상대는 동오가 아니라 위나라라며 출병을 간곡히 만류했다. 그러나 유비는 끝내 그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형제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감정, 잃어버린 형주를 회복해야 한다는 정치적 압박감, 황제로 즉위한 뒤 흔들리는 정통성을 세워야 한다는 조급함이 지도자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

결국 유비는 직접 촉한의 대군을 이끌고 동오를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지도자의 결단이 분노와 오만에 사로잡히는 순간, 전쟁은 더 이상 국가를 위한 전략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을 국가 전체에 강요하는 위험한 도박이 된다. 이릉대전의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충언을 외면한 권력, 냉정한 판단을 잃은 지도자, 사사로운 감정을 국가적 명분으로 포장한 정치의 비극이었다.

지도자는 때로 최후의 결단을 해야 한다. 그러나 결단이 곧 독선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지도자의 분노가 곧 국가의 방향이 되고, 지도자의 체면이 곧 백성의 희생으로 이어질 때, 국가는 서서히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이릉대전이 오늘날에도 반복해 읽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나라의 운명은 외부의 적보다도, 때로는 자기 확신에 갇힌 지도자의 오만에서 더 먼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 초반까지만 해도 전쟁은 유비 편이었다. 촉한의 군대는 형주 접경지대에서 동오의 명장들을 연이어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당황한 손권은 관우를 죽인 장수의 신병을 인도하고 형주성을 반환하겠다는 파격적인 유화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해 오만에 빠진 유비는 단호히 거부하고 더욱 거세게 진격했다. 유비는 처음에 관우에 대한 복수심과 형주 수복을 위한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했으나, 이제 동오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는 오만에 사로잡혀 공적인 대의를 망각한 채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기에 몰린 손권은 조정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젊고 촉망받는 장수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이릉성에서 승부수를 던졌다. 손권이 젊은 육손을 신뢰하고 뒤를 받쳐 준 배경에는 육손의 검증된 전투역량과 유비에 대한 확실한 분석과 계책이 한몫했지만, 손권의 사람 보는 혜안과 지도자다운 덕망이 크게 작용했다. 유비는 소식을 듣고 동오에 그렇게도 인재가 없다는 말인가? 전장에서 평생을 보낸 이 유비에게 저런 애송이를 보내다니?”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유비의 오만이요, 착각이었다. 오나라 4대 명문가에다가 학문을 겸비한 젊은 대도독 육손의 전략은 가히 천하를 제패할 만한 계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촉한 정예군의 강력한 기세에 정면 대결을 피하고 지구전을 선택했다.

이윽고 고온다습한 여름이 되자, 지칠 대로 지친 촉한 군대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더위를 피해 수풀이 우거진 숲과 계곡을 따라 무려 칠백 리에 달하는 거리에 군영을 일렬로 배치하는 패착을 저지른 것이다. 이를 간파한 육손은 마침내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촉한 군대 지도자는 군사를 쓸 줄도 모르고 전략도 없구나. 마른 숲에다가 군막을 치다니 참 어리석다.”라고 기뻐하면서, 회심의 전략인 화소연영(火燒連營)’ 작전을 감행했다. 수풀이 우거진 계곡에 일렬로 늘어선 촉한 군대의 군막들은 강풍을 타고 연쇄적으로 불타올랐다. 아비규환 속에서 촉한의 장수 풍습과 장남 등 차세대 명장들과 수많은 정예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릉성 전투에서 대패한 후 간신히 목숨만 건진 유비는 백제성으로 피신한 뒤 극심한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화병을 얻고 말았다. 결국 제갈공명에게 국가의 미래와 아들의 후사를 부탁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동오와 사활을 걸었던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후 촉한은 끝내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대륙 삼국의 형세는 위나라의 절대적 우위로 굳어졌다. 그리고 결국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릉대전의 결과는 지도자가 독선과 오만을 부릴 때 국가공동체가 어떻게 파멸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교훈을 후세에 남겨주었다. 유비에게는 당대 최고의 지략가 제갈공명과 냉철한 안목을 가진 무장 조자룡 등 훌륭한 참모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쟁으로 인한 국가와 백성들의 파국을 예견하며 지도자의 독선을 만류했다. 그러나 유비는 황제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도취하여 참모들의 충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생 의리와 덕망을 무기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 유비, 그의 마지막 뒷모습이 이토록 실망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외부의 강력한 적이 아니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독선과 오만이라는 내부의 적에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유비는 한때 사람의 마음을 잘 얻는 능력을 가지고 천하의 인재를 불러 모았고,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며 촉한의 기반을 세웠다. 그러나 이릉대전 앞에서 그는 자신을 지탱해 온 가장 큰 장점마저 잃고 말았다. 의리는 복수심으로 변했고, 결단은 독선으로 기울었으며, 명분은 냉정한 전략 판단을 가리는 장애물이 되었다. 지도자가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국가의 공적 의사결정 위에 올려놓는 순간, 그 피해는 지도자 개인에게 그치지 않는다. 그 부담은 군사와 백성, 그리고 나라 전체가 짊어지게 된다.

무릇 지도자는 오로지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평안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사로운 감정을 절제하고, 공적 시스템을 중시하며, 충성스러운 참모들의 직언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삼국지 이릉대전이 오늘날 지도자들에게 남겨준 준엄한 리더십 교훈이다.

 

관리자 (gp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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